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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드는 일은 오히려 낯선 작품에 뛰어드는 것보다 어려울 때가 있다. 이미 수차례 변주됐고, 저마다 마음속에 선명한 이미지가 남아 있는 고전이라면 더욱 그렇다. 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한 ‘스캔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2003년 영화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지창욱은 그 부담을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가 선택한 인물은 욕망과 사랑, 집착과 흔들림이 한데 얽힌 조원이다. 쉽게 정의되지 않는 인물이기에 배우에게는 어려운 숙제였지만,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얼굴을 꺼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여기에 정지우 감독과의 만남은 익숙한 연기 방식을 내려놓게 한 또 하나의 계기가 됐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사실 없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원작이 고전이라는 점이 저에게는 오히려 큰 용기가 됐던 것 같고요. 제가 사실 이 조원이라는 캐릭터, 원작의 발몽이라는 캐릭터를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 정말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역할임에 분명하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 같아요. 부담은 부담이지만 정지우 감독님과 작업하면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지창욱이 조원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욕망하면서 동시에 벗어나고 싶어 하는 모순이 한 인물 안에 공존한다. 그는 처음부터 조원의 심리를 명확한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하기보다 인물 사이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사람으로 바라봤다.
“음, 일단 저의 첫 시작은 그 여자를 사랑하는 조원이라는 인물로 생각했었는데요. 이 캐릭터 자체가 저에게는 매우 복합적이었고, 인물 간의 관계가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이런 복합적이고 어려운 감정들을 한번 표현해보고 싶다,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시리즈라는 형식은 조원을 비롯한 인물들의 관계와 과거를 영화보다 긴 호흡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지창욱에게도 그것은 캐릭터의 감정을 미리 결정한 뒤 재현하는 작업이 아니라 촬영 과정에서 계속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경험이 됐다.
“아무래도 저희 작품은 시리즈이다 보니까 조원이라는 인물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의 서사가 조금 더 들어가요. 그래서 관계의 변화나 인물의 서사가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었던 부분이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원이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을 감독님과 같이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되게 색다르고 새로운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특히 정지우 감독과의 작업은 그동안 지창욱이 연기를 대했던 방식에도 변화를 줬다. ‘스캔들’에서는 정답을 정하지 않은 채 여러 테이크를 반복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표정과 감정을 발견했다. 불확실성을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는 괴로운 작업이었지만, 동시에 17년 차 배우에게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 과정이었다.
“저희가 작품 안에서 어떤 해답을 찾고 그걸 표현하며 나아갔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이 사람의 심리 자체가 사실 어떤 해답이 없었던 것 같아요. 계속 흔들리고 알 수 없는 형태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감독님도 저도 ‘이 감정은 또렷하게 이런 감정이야’라고 정답을 내려놓고 촬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많은 테이크를 가다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표현될 때가 있어요. 저 스스로도 내가 무엇을 표현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테이크들이 있었는데, 추측건대 감독님은 그런 부분을 의도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연기할 때 배우가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는데요.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업했던 것 같아요. 그게 너무 혼란스럽고 괴롭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또 재미있었고, 그 안에서 저도 모르는 표정이나 표현 방식을 만났을 때는 색다르고 새로웠어요.”
새로운 작업 방식은 촬영 첫날부터 시작됐다. 조 씨 부인과 조원이 재회하는 1부 엔딩과 2부 초반의 중요한 장면이 첫 촬영으로 잡혔다. 지창욱은 돌이켜보면 바로 그 낯섦까지도 연출의 일부였던 것 같다고 했다.
"이걸 첫 촬영으로 배치해 놓은 연출자의 심리가 뭘까 굉장히 궁금했거든요. ‘이거 너무 고약하다, 배우한테 잔인하다, 몸도 안 풀렸고 스태프분들과도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중요하고 어려운 장면을 배치하다니’ 하면서 연기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익숙지 않음에서 나오는 새로운 지점들을 원하셨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때 기술적으로나 스스로 만족하진 못했지만, 그 안에서 오는 미묘한 호흡의 새로움이 있었거든요.”
그런 시도는 배우 생활을 이어오며 반복해서 마주한 고민과도 맞닿아 있었다. 오래 연기할수록 결국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얼굴과 습관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스캔들’에서는 모니터를 하지 않고 많은 테이크를 가는 등 정지우 감독과 새로운 루틴을 만들면서 그 익숙함을 흔들었다.
“사실 그런 순간들은 매 작품 느끼는 것 같아요.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데 그게 가끔 싫을 때가 있다’거나, ‘왜 내가 연기하면 너무 뻔해 보이고 항상 하던 것 같을까’ 하는 고민들은 매 작품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할 때는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만의 작업 방식을 구축해 나갔어요. 굉장히 많은 테이크를 가며 다양한 표현 방식을 담아내고, 모니터를 하지 않는 작업 방식 등을 통해 감독님과 계속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갔던 것 같아요.”
조원이라는 인물의 핵심에는 조 씨 부인과의 관계가 놓여 있다. 한때의 사랑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그의 가치관과 욕망을 형성해온 사람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연애 감정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품는다.
“저는 조원과 조 씨 부인의 관계가 굉장히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조원의 성장 과정에서 조 씨 부인(조윤희)이라는 인물은 성장 배경뿐만 아니라 가치관과 철학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거든요. 그래서 조원에게 조 씨 부인은 큰 사랑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릴 때 느낀 그 감정이 과연 사랑이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영향을 받아서 어쩌면 가스라이팅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도 했고요. 나중에 조 씨 부인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도 사랑이자 욕심이고, 더 나아가 복수의 과정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조원은 조 씨 부인에게서 도망치고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무너져 내리게 돼요.”
희연은 조원이 알던 감정의 세계를 흔드는 존재다. 두 사람 사이의 변화는 극적인 장면보다 사소한 감정의 온도에서 시작된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조원에게 가장 큰 충격은 희연에게서 ‘따뜻함’을 느꼈다는 점인 것 같아요. 대사 중에 ‘따뜻하더이다’라는 대사가 있는데, 그게 조원이라는 인물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조윤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상처받았고, 이후 쾌락을 좇으며 난봉꾼으로 살았어요. 단 한 번도 따뜻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던 인물이 희연에게서 따뜻함을 느낀 순간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습니다."
조 씨 부인을 연기한 손예진과의 호흡은 그래서 더욱 중요했다. 두 사람은 큰 신체적 접촉 없이도 눈빛과 대화만으로 긴장감을 만들어야 했다.
“조 씨 부인과 함께하는 장면은 단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서로 웃고 있지만 싸우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관계라 집중을 정말 많이 했고요. 카메라 앵글이나 음악도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줬습니다. 그래서 조 씨 부인과 촬영하고 나면 항상 지치고 힘들었는데, 정지우 감독님 스타일이 롱테이크를 좋아하셔서 한 테이크가 10분이 넘어가더라고요. 예진 선배님과의 작업은 저에게 꿈같은 일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선배님이라 부끄럽지 않은 파트너가 되고 싶어서 정말 긴장도, 준비도 많이 했습니다. 정말 든든한 동료이자 선배님이셨고, 숨 막히는 집중력을 가진 분이에요. 현장의 중심과 기둥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희연 역의 나나와는 정반대의 관계성을 만들어야 했다. 조 씨 부인과의 장면에 팽팽한 긴장이 필요했다면, 희연과는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꺼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 중요했다.
“선후배를 떠나 동료로서 나나 씨, 손예진 선배님과 어떻게 하면 좋은 장면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편인데요. 나나 씨는 작품에 몰입해서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편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현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도움을 주려 노력했어요. 저 역시 나나 씨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노출과 베드신 역시 자극 자체보다 관계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접근했다. 신체적 표현의 강도를 앞세우기보다 그 장면이 인물들의 관계에서 왜 필요한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촬영의 출발점이었다.
“작품 특성상 노출과 베드신이 있어서 긴장과 부담이 되긴 했지만, ‘위험한 관계’라는 고전 원작과 정지우 감독님의 연출 스타일을 믿고 용기를 냈습니다. 촬영 전 감독님과 베드신이 가지는 의미와 연출 의도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그 베드신이 작품 내에서 어떤 의도로 표현되는지에 대해 깊이 대화했습니다.”
‘스캔들’은 친절하게 감정을 설명하거나 빠르게 사건을 밀어붙이는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감상 역시 여러 방향으로 나뉠 수밖에 없다. 지창욱에게는 바로 그 여백이 이 작품의 성격이자 매력이었다.
“애초에 호불호가 없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응들조차 재미있었어요. 원작과의 비교나 호흡에 대한 이야기들도 ‘그렇게 볼 수 있겠구나’ 하고 다 납득이 됩니다. 저는 처음 작품을 봤을 때 정지우 감독님이 쓴 문학 작품을 읽은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대중분들에게는 호흡이 느리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17년 동안 배우로 살아왔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가 무뎌진 것은 아니다. 다만 좋은 반응과 나쁜 반응 모두를 작품 다음에 따라오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법은 조금씩 익혔다.
“그럼요, 아직도 상처받습니다. 공들여 만든 작품이 무시당하거나 호평 혹은 비평을 받는 일은 계속 반복되는 숙명 같아요. 칭찬만 원했다면 부담감 때문에 연기를 계속하지 못했을 겁니다. 비판을 들으면 ‘아, 이래서 별로였구나’ 배우기도 하고요. 멘탈 관리를 하며 덤덤하게 다음 작품을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원칙은 ‘칭찬에 너무 들뜨지 말고, 비난에 주눅 들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 중심을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최근 몇 년간 장르와 플랫폼을 넘나들며 쉼 없이 작품을 이어온 동력은 거창한 목표보다는 여전히 연기에서 발ㅋ재미에 있다. 대신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분명하다.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에게 ‘왜 이 작품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아주 명확한 저만의 ‘명분’이 필요해요. ‘내가 이 작품을 하고 싶은 이유’가 확실하면 도전합니다. ‘스캔들’은 원작 캐릭터를 꼭 표현해보고 싶었고, 정지우 감독님과 작업해보고 싶다는 명분이 명확했어요. 연기하는 재미와 설렘이 아직 크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일하다 지치면 휴식을 취하다가, 또 저를 설레게 하는 작품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덧 현장에서 ‘선배님’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운 배우가 됐다. 지창욱은 나이가 드는 것을 거스르기보다 그 변화가 새로운 역할을 가져오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스캔들’에서 발견한 낯선 얼굴 역시 그 과정의 한 대목이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나이에 맞게 얼굴과 성격, 감정이 변하고 맡는 역할도 자연스럽게 넓어지니까요. 나이 드는 것의 장단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변화는 차기작에서도 이어진다. 다음 달 공개되는 한일 합작 프로젝트 ‘메리 베리 러브’와 전지현과 호흡을 맞추는 판타지 로맨스 ‘인간 구미호’까지, 지창욱은 서로 다른 장르와 캐릭터를 오가며 새로운 얼굴을 준비하고 있다. 익숙한 자신의 모습을 경계하면서도 지금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배우. 작품마다 새로운 모습에 도전해온 지창욱의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사진 제공 = 넷플릭스]
YTN star 최보란 (ran613@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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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욱은 그 부담을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가 선택한 인물은 욕망과 사랑, 집착과 흔들림이 한데 얽힌 조원이다. 쉽게 정의되지 않는 인물이기에 배우에게는 어려운 숙제였지만,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얼굴을 꺼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여기에 정지우 감독과의 만남은 익숙한 연기 방식을 내려놓게 한 또 하나의 계기가 됐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사실 없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원작이 고전이라는 점이 저에게는 오히려 큰 용기가 됐던 것 같고요. 제가 사실 이 조원이라는 캐릭터, 원작의 발몽이라는 캐릭터를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 정말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역할임에 분명하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 같아요. 부담은 부담이지만 정지우 감독님과 작업하면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지창욱이 조원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욕망하면서 동시에 벗어나고 싶어 하는 모순이 한 인물 안에 공존한다. 그는 처음부터 조원의 심리를 명확한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하기보다 인물 사이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사람으로 바라봤다.
“음, 일단 저의 첫 시작은 그 여자를 사랑하는 조원이라는 인물로 생각했었는데요. 이 캐릭터 자체가 저에게는 매우 복합적이었고, 인물 간의 관계가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이런 복합적이고 어려운 감정들을 한번 표현해보고 싶다,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시리즈라는 형식은 조원을 비롯한 인물들의 관계와 과거를 영화보다 긴 호흡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지창욱에게도 그것은 캐릭터의 감정을 미리 결정한 뒤 재현하는 작업이 아니라 촬영 과정에서 계속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경험이 됐다.
“아무래도 저희 작품은 시리즈이다 보니까 조원이라는 인물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의 서사가 조금 더 들어가요. 그래서 관계의 변화나 인물의 서사가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었던 부분이 흥미로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원이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을 감독님과 같이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되게 색다르고 새로운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특히 정지우 감독과의 작업은 그동안 지창욱이 연기를 대했던 방식에도 변화를 줬다. ‘스캔들’에서는 정답을 정하지 않은 채 여러 테이크를 반복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표정과 감정을 발견했다. 불확실성을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는 괴로운 작업이었지만, 동시에 17년 차 배우에게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 과정이었다.
“저희가 작품 안에서 어떤 해답을 찾고 그걸 표현하며 나아갔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요. 이 사람의 심리 자체가 사실 어떤 해답이 없었던 것 같아요. 계속 흔들리고 알 수 없는 형태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감독님도 저도 ‘이 감정은 또렷하게 이런 감정이야’라고 정답을 내려놓고 촬영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많은 테이크를 가다 보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표현될 때가 있어요. 저 스스로도 내가 무엇을 표현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테이크들이 있었는데, 추측건대 감독님은 그런 부분을 의도하셨던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연기할 때 배우가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는데요. 이번 작품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업했던 것 같아요. 그게 너무 혼란스럽고 괴롭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또 재미있었고, 그 안에서 저도 모르는 표정이나 표현 방식을 만났을 때는 색다르고 새로웠어요.”
새로운 작업 방식은 촬영 첫날부터 시작됐다. 조 씨 부인과 조원이 재회하는 1부 엔딩과 2부 초반의 중요한 장면이 첫 촬영으로 잡혔다. 지창욱은 돌이켜보면 바로 그 낯섦까지도 연출의 일부였던 것 같다고 했다.
"이걸 첫 촬영으로 배치해 놓은 연출자의 심리가 뭘까 굉장히 궁금했거든요. ‘이거 너무 고약하다, 배우한테 잔인하다, 몸도 안 풀렸고 스태프분들과도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중요하고 어려운 장면을 배치하다니’ 하면서 연기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익숙지 않음에서 나오는 새로운 지점들을 원하셨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때 기술적으로나 스스로 만족하진 못했지만, 그 안에서 오는 미묘한 호흡의 새로움이 있었거든요.”
그런 시도는 배우 생활을 이어오며 반복해서 마주한 고민과도 맞닿아 있었다. 오래 연기할수록 결국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얼굴과 습관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스캔들’에서는 모니터를 하지 않고 많은 테이크를 가는 등 정지우 감독과 새로운 루틴을 만들면서 그 익숙함을 흔들었다.
“사실 그런 순간들은 매 작품 느끼는 것 같아요.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데 그게 가끔 싫을 때가 있다’거나, ‘왜 내가 연기하면 너무 뻔해 보이고 항상 하던 것 같을까’ 하는 고민들은 매 작품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할 때는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만의 작업 방식을 구축해 나갔어요. 굉장히 많은 테이크를 가며 다양한 표현 방식을 담아내고, 모니터를 하지 않는 작업 방식 등을 통해 감독님과 계속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갔던 것 같아요.”
조원이라는 인물의 핵심에는 조 씨 부인과의 관계가 놓여 있다. 한때의 사랑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그의 가치관과 욕망을 형성해온 사람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연애 감정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품는다.
“저는 조원과 조 씨 부인의 관계가 굉장히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조원의 성장 과정에서 조 씨 부인(조윤희)이라는 인물은 성장 배경뿐만 아니라 가치관과 철학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거든요. 그래서 조원에게 조 씨 부인은 큰 사랑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릴 때 느낀 그 감정이 과연 사랑이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영향을 받아서 어쩌면 가스라이팅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도 했고요. 나중에 조 씨 부인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도 사랑이자 욕심이고, 더 나아가 복수의 과정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조원은 조 씨 부인에게서 도망치고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무너져 내리게 돼요.”
희연은 조원이 알던 감정의 세계를 흔드는 존재다. 두 사람 사이의 변화는 극적인 장면보다 사소한 감정의 온도에서 시작된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조원에게 가장 큰 충격은 희연에게서 ‘따뜻함’을 느꼈다는 점인 것 같아요. 대사 중에 ‘따뜻하더이다’라는 대사가 있는데, 그게 조원이라는 인물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조윤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상처받았고, 이후 쾌락을 좇으며 난봉꾼으로 살았어요. 단 한 번도 따뜻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던 인물이 희연에게서 따뜻함을 느낀 순간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습니다."
조 씨 부인을 연기한 손예진과의 호흡은 그래서 더욱 중요했다. 두 사람은 큰 신체적 접촉 없이도 눈빛과 대화만으로 긴장감을 만들어야 했다.
“조 씨 부인과 함께하는 장면은 단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서로 웃고 있지만 싸우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관계라 집중을 정말 많이 했고요. 카메라 앵글이나 음악도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줬습니다. 그래서 조 씨 부인과 촬영하고 나면 항상 지치고 힘들었는데, 정지우 감독님 스타일이 롱테이크를 좋아하셔서 한 테이크가 10분이 넘어가더라고요. 예진 선배님과의 작업은 저에게 꿈같은 일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선배님이라 부끄럽지 않은 파트너가 되고 싶어서 정말 긴장도, 준비도 많이 했습니다. 정말 든든한 동료이자 선배님이셨고, 숨 막히는 집중력을 가진 분이에요. 현장의 중심과 기둥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희연 역의 나나와는 정반대의 관계성을 만들어야 했다. 조 씨 부인과의 장면에 팽팽한 긴장이 필요했다면, 희연과는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꺼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 중요했다.
“선후배를 떠나 동료로서 나나 씨, 손예진 선배님과 어떻게 하면 좋은 장면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편인데요. 나나 씨는 작품에 몰입해서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편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현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도움을 주려 노력했어요. 저 역시 나나 씨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노출과 베드신 역시 자극 자체보다 관계를 드러내는 장면으로 접근했다. 신체적 표현의 강도를 앞세우기보다 그 장면이 인물들의 관계에서 왜 필요한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촬영의 출발점이었다.
“작품 특성상 노출과 베드신이 있어서 긴장과 부담이 되긴 했지만, ‘위험한 관계’라는 고전 원작과 정지우 감독님의 연출 스타일을 믿고 용기를 냈습니다. 촬영 전 감독님과 베드신이 가지는 의미와 연출 의도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그 베드신이 작품 내에서 어떤 의도로 표현되는지에 대해 깊이 대화했습니다.”
‘스캔들’은 친절하게 감정을 설명하거나 빠르게 사건을 밀어붙이는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감상 역시 여러 방향으로 나뉠 수밖에 없다. 지창욱에게는 바로 그 여백이 이 작품의 성격이자 매력이었다.
“애초에 호불호가 없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응들조차 재미있었어요. 원작과의 비교나 호흡에 대한 이야기들도 ‘그렇게 볼 수 있겠구나’ 하고 다 납득이 됩니다. 저는 처음 작품을 봤을 때 정지우 감독님이 쓴 문학 작품을 읽은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대중분들에게는 호흡이 느리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17년 동안 배우로 살아왔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가 무뎌진 것은 아니다. 다만 좋은 반응과 나쁜 반응 모두를 작품 다음에 따라오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법은 조금씩 익혔다.
“그럼요, 아직도 상처받습니다. 공들여 만든 작품이 무시당하거나 호평 혹은 비평을 받는 일은 계속 반복되는 숙명 같아요. 칭찬만 원했다면 부담감 때문에 연기를 계속하지 못했을 겁니다. 비판을 들으면 ‘아, 이래서 별로였구나’ 배우기도 하고요. 멘탈 관리를 하며 덤덤하게 다음 작품을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원칙은 ‘칭찬에 너무 들뜨지 말고, 비난에 주눅 들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 중심을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최근 몇 년간 장르와 플랫폼을 넘나들며 쉼 없이 작품을 이어온 동력은 거창한 목표보다는 여전히 연기에서 발ㅋ재미에 있다. 대신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분명하다. 새로운 도전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에게 ‘왜 이 작품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아주 명확한 저만의 ‘명분’이 필요해요. ‘내가 이 작품을 하고 싶은 이유’가 확실하면 도전합니다. ‘스캔들’은 원작 캐릭터를 꼭 표현해보고 싶었고, 정지우 감독님과 작업해보고 싶다는 명분이 명확했어요. 연기하는 재미와 설렘이 아직 크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일하다 지치면 휴식을 취하다가, 또 저를 설레게 하는 작품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덧 현장에서 ‘선배님’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운 배우가 됐다. 지창욱은 나이가 드는 것을 거스르기보다 그 변화가 새로운 역할을 가져오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스캔들’에서 발견한 낯선 얼굴 역시 그 과정의 한 대목이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나이에 맞게 얼굴과 성격, 감정이 변하고 맡는 역할도 자연스럽게 넓어지니까요. 나이 드는 것의 장단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변화는 차기작에서도 이어진다. 다음 달 공개되는 한일 합작 프로젝트 ‘메리 베리 러브’와 전지현과 호흡을 맞추는 판타지 로맨스 ‘인간 구미호’까지, 지창욱은 서로 다른 장르와 캐릭터를 오가며 새로운 얼굴을 준비하고 있다. 익숙한 자신의 모습을 경계하면서도 지금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배우. 작품마다 새로운 모습에 도전해온 지창욱의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사진 제공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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